일주일 전에 일본, 큐슈에서 있었던 이야깁니다.
이거 하나때문에 가족 모두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새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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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파크, 하우스텐보우스에서 마지막 날을 보낸 가족은 이젠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비행기 시간은 8시. 현재 시간은 4시. 공항까지 두시간 남짓 걸리니 딱 적당한 시간이였지요.
테마파크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역에서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큐슈에 가 있는 동안 몇 일동안 간간히 비가 자주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날씨는 덥다는 끝내주는 상황이 몇 일 있었는데 그 날은 다행히(?) 시원하게 내려주더군요.
습기가 가득 차 축축한 느낌이 들었지만 기차와 공항, 비행기는 건조한 에어컨 공기니 별 걱정은 안했습니다.

역에서, 멀찌감치 보이는 하우스텐보우스를 바라보며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역에 우리 가족밖에 없었지만 10분도 안되어 많은 귀객들로 북적거렸고,
이윽고 서서히 기차가 도착할 시각이 되었지요.

하지만 안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기차의 예정변경 안내.
하카타 역(후쿠오카)에서 내린 엄청난 비로 인해 하카타행 열차가 오지를 못한답니다.
대신 다른 열차를 타고 가다가 하카타행으로 갈아타라는 친절한 안내였지요.
정말 다행히, 이 사람이 그 방송을 제대로 캐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헤매지는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후후, 가이드 역으로 끌려왔으면서 큐슈에 대해 모른다는 이유로 여행 내내 갈굼을 받다가(...)
그래도 일본어를 좀 알아들으니 데려오길 잘 했다! 라는 칭찬을 들으며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조금이라도 헤맸다면 어떻게 됐을련지.


열차의 자유석에 앉아 2시간동안 멍하니 있다보면 하카타 역에 도착.
여행 내내 열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이젠 이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도착 때까지 잠이라도 자려고 했지만,

섰습니다.
가다가 섰습니다.

안내 방송으로는 '하카타 역에 내린 어마어마한 비 때문에 열차운행이 지연되고 있다' 라고 하는데,
언제 다시 출발해 줄지는 말해주지 않더군요.

결국 열차 안에 꼼짝없이 갇혀 다시 운행하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간이 정말 끔찍한 스트레스의 시간이였는데,
8시에 출발한다는 비행기를 놓치기 딱 좋은 시츄에이션이였기 때문이죠.

뭐, 비행기를 놓쳐도 다음 비행기를 태워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최악의 상황이라면 비행기표는 다 날라가게 된다죠. 아아...

결과를 말하자면 열차는 총 2시간 27분을 연착했습니다.(안내방송 근거)

하지만 당시에는 '5분 후면 출발하겠지', '10분 후면 출발하겠지' 느낌이여서
기다리는게 정말 애가 타 미치겠더군요.

결국 열차가 출발한다, 싶으면 5분 가다가 다시 멈췄습니다.
그리고 10분 쉬다가 다시 출발, 5분 가고 또 멈춤.
그야말로 사람 애간장 태우기의 경지를 보았습니다. 우와.

열차 안에서 시간은 바야흐로 도착예정 시각인 6시를 넘어, 7시를 넘어가기 시작했지요.
속이 타들어가는 가운데 아무것도 못했던 이 사람이나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온갖 수를 써서 비행기의 출발을 막으려고 하셨죠.
중간 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는 방법을 생각하시고,(열차 타는게 더 빠르다는 역무원 말에 포기)
주위 일본인에게 핸드폰을 빌려 여행사에 전화하시고,(중간에서 이 사람만 죽어갔습니다)
대한항공 측에 전화해서 미리 양해를 구해두기도 했지요.

사실 아버지가 이것저것 시키는 탓에 중간에 끼어서 죽을 것 같았지만,
나중에 공항에 도착해서 아버지가 제대로 다 처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여행사를 통한 티켓팅이나 하는 것은 전혀 몰랐어서...


여하튼 중간에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열차!(무슨 막힌 고속도로냐!!!)
비행기 출발시간으로 알고 있었던 8시가 넘어, 8시 15분 쯤이 되자 마침내 하카타 역에 도착했습니다.


하카타 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아버지께서 내린 지시.
도착하자 마자 무조건 뛸 것.
아버지는 락커에 가서 짐을 찾아오고, 이 사람과 어머니는 달려서 택시를 잡을 것.

열차 문앞에 버티고 서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미친듯이 달려나갔습니다.
다행히 하카타 역의 지리는 몇 일동안 익숙해져 있어서 쉽게 길을 찾아 나갔지요.
아버지는 평소의 움직임이나 체격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스피드로 달려나가셨고...
어머니는... 중간에 달리다가 걱정이 되서 뒤를 돌아보니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고 계시더군요.
눈치를 채서 망정이지.

역 밖에 나가자마자 택시(!!)를 잡아 탔습니다. 교통비가 비싸다던가, 그런 말을 할 처지가 못 되요.
일본 택시는 문이 저절로 열리는데, 앞쪽 문은 저절로 열리지 않기 때문에 잠깐 당황했었습니다.
아니, 원래 앞쪽에는 타지 않는건가?

하여간 택시에 올라타서 전속력으로 후쿠오카 국제공항으로 가줄 것을 요청했지요.
뒤에서 아버지가 '5분 내로!!' 를 외치시길래 일단 말해봤지만...

"5분? 무리! 무리에요!! 빨리 달려서 10분."
...이라고 좀 과장된 제스쳐와 함께 말씀하시건 나이 지긋한 기사 아저씨.
하지만 급한 상황이 잘 전달됐는지 힘껏 달려주셨습니다.

그야말로 한국 택시를 타는 기분으로 쌩쌩 날랐고,
중간에 교통신호 위반을 하길 두 차례.(...)
생각보다 빠르게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네요.

사이에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원래 JR열차가 이렇게 연착하는지 물어봤습니다.(아버지의 질문)
평소에는 이런 일은 상상할 수 없는데 비가 엄청 왔었다고 하더군요.

공항에 도착하자 택시비를 맡기고 다시 뛰시는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에게 받은 돈을 지불하려고 보니 1,300엔인 택시비를 1,301엔.
"아하하, 1엔이 잘못 들어갔네요" 하고 빼냈지만, 사실 눈치를 챘습니다.
아버지가 팁으로 100엔(......)을 주려다가 실수했다는 것을.

결국 힘써주신 데에 비해 팁을 못 드렸지만, 원래 팁 문화가 없는 나라니깐.
그것보다 팁이랍시고 1,301엔을 주었다면 두고두고 욕 했을 겁니다. 분명히.


그 때의 시간이 8시 35분. 비행기 출발 시간은 8시 45분.
티켓팅, 짐 맡기기, 입구 들어가기, 바디 체크, 여권 검사,
게이트 통과, 비행기표 검사, 비행기 탑승...

이 모든 과정이 공항에 도착해서 2분 만에 이뤄졌습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열차 안에서 아버지의 그 호들갑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였죠.
공항 측에서 미리 알고 한순간에 그 과정을 다 진행해 주더군요.

결국 막 달려서 이륙 5분 전에 탑승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늦게 탑승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하긴, 역이 아예 정지했다고 했으니.


대충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웃음)
정말 역하고 공항에서 미친듯이 달린 기억이 생생하네요. 중간에 어머니 찾으러 역주행했던 기억도.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정말 전율과 공포의 4시간이였습니다.
막판 1시간이 최종 스퍼트. 어머니는 수년 만에 이렇게 달려봤다네요.

잊을 수 없는 여행의 추억을 주어서 고마워요, JR.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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